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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광대 -가왕 조용필과의 추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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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거인 조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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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조용필과 잘 안다. 아니 조용필을 전혀 모른다. 말장난 같지만 사실이 그렇다. 조용필과의 인연은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다. 취재원과 기자로 만나 열 살 연상인 그를 형이라 부르면서 가까이 지내왔다. 그러나 조용필은 벗겨도 벗겨도 또 나오는 양파 같은 존재여서 그를 잘 안다고 말하기엔 여전히 뭔가 부족하다. 하여 그를 잘 안다고 말하는 것은 거대한 킬리만자로 산을 멀리서 바라보고 킬리만자로를 잘 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첫 만남은 강렬했다. 첫 인터뷰를 하던 날, 그는 새파란 30대였다. 그때도 조용필은 대한민국 조용필이었다. 

그와 인터뷰를 끝내고 술을 마셨다. 결과부터 얘기하면 나는 새벽 다섯 시, 그로부터 도망쳤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차수를 변경하여 동틀 무렵 포장마차까지 갔으나 끝이 나지 않았다. “한잔 더 하러 가자”는 조용필의 제안을 뿌리치고 도망쳐 왔다. 

초저녁에 몇몇 사람이 술자리를 시작했지만 동틀 무렵에는 나와 조용필 두 사람 뿐이었으니까. 


 그로부터 근 30년이 지난 2013년 6월, 조용필의 서울공연 ‘헬로’가 펼쳐지던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VIP룸. 그는 공연을 하루 앞두고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리허설 중간에 잠깐 쉬고 있는 그를 만나러 VIP룸에 갔을 때 그는 넓은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마치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고독한 모습이었다. 


 “형의 노래 인생 절정은 어디쯤일까? 도대체 웬 인기가 갈수록 올라가는 거야?” 그랬다. 

조용필의 새 앨범 <<헬로>>는 <바운스>와 <헬로> 등이 잇달라 히트하면서 조용필 신드롬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언론에서는 ‘가왕(歌王)의 귀환’이라고 했고, 그를 모르던 초등학생들조차 ‘조용필’을 얘기했다. “늘 새로우니 좋지 않냐?” 그의 짧은 답변에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물리적인 나이로야 환갑을 넘겼으니 이제  ‘초로의 노인’ 반열에 올랐지만, 그렇게 대답하면서 씩 웃는 모습에서 나는 미소년의 수줍음을 봤다. 

어쩌면 그의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 삶의 태도, 음악적 태도가 ‘가왕의 귀환’을 만들었을지 모르겠다. 


 말술을 마시면서 끊임없이 줄담배를 피워대던 30대의 조용필은 이제 없다. 하루 두 갑 이상 피우던 담배는 2005년도에 끊었고, 요즈음엔 술도 한 달에 한두번 반주 정도가 고작이라고 했다.    

“아, 옛날 같지 않아. 이제 공연을 마치고도 술을 안 마셔. 모레 공연 끝나고 친구가 술자리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사양했어. 일주일 뒤에 또 공연이 있는데 조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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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이제 줄담배 대신, 또  좋아하는 술 대신 공연과 음반을 피우고 마신다. 그의 인생에서 공연과 음반 작업 외에 또 다른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내가 20년 넘게 예리한(?) 기자의 눈으로 관찰한 결과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열애설 등은 모두 낭설이다. 언젠가 하도 답답해서 “연애도 좀 하시라”고 권했을 때 “아, 그게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라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래서 “프로포즈하는 여자도 없냐?”고 물었더니 “없을 리가 있겠냐?”면서 겸연쩍게 웃었다. 하긴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게다가 혼자 사는 그를 이 땅의 여성들이 그냥 놔둘 리 있을까? 그의 핸드폰 번호는 몇 달 안 되면 어김없이 다른 번호로 바뀐다. 

극히 일부의 몇몇 사람에게만 공개된 핸드폰 번호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적극적인 여성’들에 의해 봉인이 해제 된다. 그녀들은 밤낮없이 전화를 해서 구애작전을 펼친다. 개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인사들도 있다. 


 “제가 아는 점쟁이가 저와 결혼하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가 된다고 했어요. 저도 그럴 자신이 있어요. 제발 저랑 결혼해 주세요” “저는 몸매도 좋고 얼굴도 예뻐요. 한번 만나보시면 저한테 반하실 거예요.”

 밤낮없이 전화를 하는 여성들 때문에 조용필은 어쩔 수 없이 기존 전화번호가 노출되면 다른 번호로 바꿀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최고의 유명인으로 산다는 것,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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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고 조용한 아이, 화성에서 집을 나서다

 조용필은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1950년 3월 21일, 염전업과 정미소를 경영하던 아버지 조경구(1986년 작고)와 어머니 김남숙(1991년 작고) 사이에서 3남 4녀 중 여섯째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화성 일대에서 손꼽히는 부자였고, 그 재산을 아버지가 고스란히 물려받았기에 조용필의 어린 시절은 풍족한 편이었다. 

초등학교 무렵 하모니카 연주에 매료되어 하루 종일 하모니카를 불곤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가수의 꿈을 키우던 소년은 아니었다. 

남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내성적인 소년이었고, 홍역을 앓다 시력이 나빠져서 한동안 학교를 쉬기도 했던 약골이었다. 


 중학교 시절 서울로 전학 온 그는 경동중학교에 들어간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곳에서 배우 안성기와 같은 반 친구로 교유했다. 안성기의 회상에 의하면 조용필은 그 당시에도 기타를 열심히 쳐서 손가락이 까맣게 변할 정도였다고 한다. 

청소년기에서부터 어느 정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니니 로소의 트럼펫 연주를 듣고 매료된 사춘기의 조용필은 자신도 언젠가는 멋진 트럼펫을 부는 연주자가 되리라 마음먹는다. 


 경동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는 여전히 기타리스트를 꿈꾸면서 열심히 기타를 연습하곤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막내아들이 ‘딴따라’가 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기타를 부수면서까지 공부할 것을 종용했지만 그럴수록 소년 조용필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커져만 갔다.


 심야 음악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 레이 찰스와 벤처스 악단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는 더욱 열심히 기타 줄을 골랐다. 

고등학교 시절 벤처스 악단의 내한공연을 보면서 조용필은 피가 끓어 올랐다. 무대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는 멤버들에게서 느껴지는 인간의 무한한 능력에 하염없이 감탄했다. 

기타를 열심히 치면 언젠가는 나도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멋진 연주를 할 수 있을까? 교과서보다는 기타와 하모니카가 더 좋아졌다. 

아버지가 형을 데리고 사냥을 나가면서 함께 가자고 했으나 조용필은 방에 틀어박혀 기타를 치고 하모니카를 불었다. 그런 막내아들이 아버지는 영 마뜩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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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조용필은 1968년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음악을 위해 가출을 단행한다. 음악학원에서 만난 네 명의 친구와 함께였다. 그는 돈이 될 만한 물건이라고 생각하여 둘째 형의 독일제 제도기와 백과사전 등을 챙겨 집을 나섰다.

사진: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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