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광대 - 가왕 조용필과의 추억-(3)
페이지 정보
본문
그 사건을 설명하려면 1년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1975년 박정희 정권은 가요정화 조치라는 이름으로 청년문화의 상징이던 록과 포크를 말살시킨다.
그 시발점에 대마초가 있었다. 훗날 대마초 사건이 터진 이유가 박 대통령의 아들 지만이 대마초 피우는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자 이에 분노한 박 대통령이 대마초 가수들을 모두 잡아 들이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땅의 로커들과 포크 뮤지션들은 정권의 칼날 아래 대량학살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신중현은 물론 한대수와 이장희 등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국을 떠나기도 했다. 록과 포크가 주류를 이루던 한국 대중음악이 스탠더드 팝의 길들여진 음악으로 회귀하는 데도 대마초 사건은 큰 영향을 미쳤다.
조용필은 1969년 의정부 기지촌에서 ‘파이브 핑거스’의 맴버로 활동할 때 4차례에 걸쳐 대마초를 피운 적이 있었다.
같은 하숙집에 살던 미군 병사가 담배라면서 건네준 것을 신문지에 말아 피웠는데, 머리가 어지럽고 구역질이 나서 몇 번 피우다 말았다.
수년 전의 전과 때문에 1975년 겨울 조용필은 밤무대를 끝내고 나오던 길에 사복경찰들에게 체포되어 남산의 마약반 취조실로 끌려갔다.
그들은 대마초를 피우고 있는 동료가수들 이름을 50명 써 내라고 다그쳤다.
주전자에 있는 물을 얼굴에 붓는 물고문부터 조그만 통에 집어 넣고 각목으로 마구 구타하는 등의 고문이 밤새 이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밤무대에서 노래하는 무명가수였기에 조용필은 늘씬 두드려 맞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그가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스타덤에 오르자 주변의 투서로 악몽이 되살아난 것이다. 결국 조용필은 1977년 장충체육관에서 은퇴공연을 했다. 그날 밤 조용필은 밤새 술을 마시면서 울었다.
10년 동안 밤무대를 전전하면서도 비틀스를 꿈꾸던 그가 이제 막 비상하려다 추락한 것이다.
내가 만나온 조용필은 늘 정치적 입장이나 견해를 밝히는데 인색하다. 당대의 여당이나 야당 대표는 물론 대기업의 화장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조용필을 좋아했다.
그들은 때때로 조용필을 이용(?)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한번도 응한 적이 없다. 그 이면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짓밟혔던 쓰라린 경험이 자리잡고 있다.
그 이후 조용필은 정치적인 이슈나 정치인들에 대해 ‘불가근불가원’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의 생일이 되면 대통령은 물론 대기업 회장, 많은 팬이 화환과 선물을 보내지만 늘 조용필은 가수 조용필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이 어떤 흉기가 되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인지 조용필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전글제이엔 에이치 파이넨셜과 함께할 파트너 모집합니다. 22.10.16
- 다음글2022 예술인 협회~11.5 토 2~3시 Fernando Aguiree 클래식기타 리사이틀 22.11.1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